1. 낙안 왕소군
① 한나라 원제의 궁녀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이름은 장입니다. 성은 왕, 자는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었습니다. 후일 진나라 황제 사마소의 이름에 ‘소’ 자를 피해 명군, 명비 등으로도 일컬어졌습니다. 한나 원제 때의 궁녀입니다.
날아가는 기러기가 왕소군의 미모에 넋이 나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하는 ‘낙안’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② 중국의 상징, 한나라
기원전 202년, 강력한 맞수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친 유방(한 고조)은 한나라를 세웠습니다. 고조는 왕조 초기의 안정을 위해 여전히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각 지역 세력을 왕과 제후로 임명하여 중앙 정치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또한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고조의 정책은 다음 황제들에게도 이어져 한나라가 들어선 지 50여 년 만에 생산력이 크게 회복되었습니다. 농민의 생활은 안정되었고 사회가 번영하였습니다.
무제 때에는 왕과 제후들의 실권을 빼앗아 황제 중심의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는데, 중국 문화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습니다.진나라가 영토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이루어 냈다면 한나라 400년은 한자, 한문, 한족 등의 단어에서 보듯 문화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세운 무제는 이제 나라를 더욱 안정되게 이끌어 가려하였습니다.법가 사상과 같은 강제력 외에도 관리와 백성이 마음에서 우러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제의 바람을 뒷받침해 준 사람이 ‘동중서’였습니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 사상을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이에 따라 수도 장안에 국립 대학인 태학을 설치하고 오경 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길러진 제자들 중에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로써 유학을 배우고 그 교양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교의 성립이며 유교의 국교화입니다. 유교는 기존의 법령과 법에 따른 통치보다 황제와 관리,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충성과 책임이라는 도덕적 윤리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안정적으로 황제의 권력의 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교는 벼슬아치를 키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 이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진나라 시황제 때 북방으로 쫓겨간 흉노는 진, 한 교체기를 틈타 묵특선우가 부족을 통합하여 거대한 흉노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로써 장성을 사이에 두고 흉노 제국과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충돌을 거듭하였습니다. 비록 흉노는 인구나 물자, 문화 모든 면에서 한 제국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기마병 위주의 가공할 무력으로 한 제국에 오랫동안 굴욕을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한나라와 흉노의 굴욕적이 관계를 전환시킨 장본인은 하나라 무제입니다. 무제는 안정된 정치와 풍부한 재정을 기반으로 하여 기원전 129년부터 20여 년간 몇 차례에 걸쳐 흉노를 대규모로 공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흉노에 대한 공동 작전을 구상하여 서역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비록 서역과 연결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철저한 물량과 인해 전술을 이용하여 마침내 흉노를 고비 사막 너머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③ 흉노로 시집가다
기원전 201년 한 고조 유방이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 관계를 맺고 해마다 비단과 술, 식량 등을 흉노에게 보내고, 선우(흉노의 왕을 지칭)에게 황실의 여인을 시집 보냈습니다.
선제는 무제의 증손이며 여태자의 손자입니다. 조부 여태자가 무고의 난에서 죽었기 때문에 갓나서부터 민가에서 자랐습니다. B.C.74년 소제가 죽은 뒤, 한때 영입된 장읍왕 하가 곽광에 의해 폐위되자 18세에 황위를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곽강이 섭정하였으나 B.C.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은 뒤에는 곽씨 일족을 멸망시키고 친히 정사를 맡았습니다.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처음으로 상평창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도모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흉노의 쇠퇴함을 틈타 오손과 손잡고 흉노를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길을 서역도호로 하여 소위 서역 36국을 복속시켜 마침내 흉노를 분열되고 B.C 51년 남흉노도 한나라에 복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제 1대는 무제 이후 한 제국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하였으므로 전 한의 여러 황제 중에서도 현제(賢弟)로 꼽히고 있습니다.
현제 재위 기간 동안 한나라는 점차 강대해졌습니다. 그 때 흉노는 귀족 간의 권력 쟁탈로 인해 국력이 점차 약해져 갔습니다. 나중에는 다섯 아우 선우로 분열되어 서로 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호한사라는 선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 질지 선우에게 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습니다. 호한사는 대신들과 논의 끝에 한나라와 화의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선제를 배알 하러 장안으로 왔습니다. 호한사는 중원으로 와서 한나라 황제를 배알 한 최초의 선우였습니다. 선제는 그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습니다. 황제가 직접 장안 교외로 나아가 그들 일행을 영접했고 성대한 환영식도 열어 주었으며 대접도 각별히 후하게 했습니다. 호한사는 장안을 떠날 때에 임박해서 ‘한나라와 흉노는 한 집안 식구처럼 세세대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우호 맹약을 맺었습니다.
기원전 33년, 서제가 죽고 원제가 즉위했습니다. 원제는 선제와 달리 유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황태자 시대의 학사인 ‘소망지’등 유생을 등용했지만 아버지 시대부터 중용되고 있던 환관인 ‘홍공’, ‘석현’과 대립해 실각했습니다. 이후 원제의 치세는 환관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었습니다. 환관들의 득세를 막지 못해 결국 한의 부채와 몰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원제 때에는 후궁에 미인이 많았기 때문에 인물 초상의 명인이었던 모연수와 같은
화공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미희를 골랐다고 합니다. 미희들은 앞 다투어 모연수에게 주어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왕소군은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황제에게 간택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제 경녕 원년(B.C. 33년)에 세 번째로 장안으로 온 호한야가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친선 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표했습니다. 근 1백여 년 동안 흉노와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정했던 한나라도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원제는 후궁의 궁녀 중에서 적합한 인물을 물색해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후궁 중 가장 추한 여성으로 선택하기 위해 초상화에 그려진 가장 보기 흉한 여성을 선택하였습니다. 인물 초상화의 명인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려져 있었던 왕소군이 선택되었습니다.
후궁 왕소군은 뛰어난 미모와 총명하고 멀리 내다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위해 그리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흉노에게 시집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왕소군은 평소 그리 남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그날 치장을 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절세미인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습니다. 원제는 심히 후회하며 격노하여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 등의 화공들을 참형에 처했고 재산을 몰수하였다고 합니다.
호한야는 선발된 궁녀 다섯 중에서 유독 왕소군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원제의 어명에 따라 예부의 대신들이 길일을 택한 후 호한야와 왕소군은 장안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젊고 예쁘니 아내를 얻은 호한사의 기쁜 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 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을 떠라 몇 천 리 떨어진 흉노 선우의 영지로 시집을 갔습니다.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영호(寧胡) 알싸’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시집와서 흉노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왕소군을 얻어 마음이 흡족한 호한야는 한나라를 위해 변경을 지키며 한나라 천자와 백성들이 영원히 평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상주서를 원제에게 올렸다고 합니다.
그야 말로 색시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말이 무색합니다.
왕소군은 흉노로 가 때 많은 선물들을 가져갔습니다. 그녀는 흉노의 백성들을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 그리고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줘서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왕소군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자식들 또한 한나라와 흉노 간의 우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소군은 중국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적을 쌓은 미인이었습니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다음부터 흉노와 한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왕래가 많아졌고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호한야가 죽은 후 그녀는 한나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한 성제는 흉노의 풍습을 따르라고 거절했습니다.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이자 다음 후계자가 될 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호한야의 배다른 아들인 복주루약제 왕과 결혼하여 다시 딸 둘을 낳았습니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란 시에서 노래했습니다. 그 시구 중에서 “봄은 왔으나 봄 같지가 않구나.(春來不似春)”이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 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 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왕소군은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의 호화호툭 남쪽의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 또는 청총이라고 부릅니다.
2. 폐월 초선
뛰어난 용모가 빛나는 달과 같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능했다는 초선은 어느 날 저녁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달이 한 조각구름이 달을 가리자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라고 해서 ‘폐월’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초선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삼국지연의’에서 각색한 것입니다.
ⓐ (삼국지)에서 초선의 모델
초선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습니다. 정사 후한서 여포 전에 의하면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고자 정원의 군대를 손에 넣고 싶어 했습니다. 여포는 동탁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기도위에 올랐으며 그의 양아들까지 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직위가 점차 올라 중량장에 도정후가 되었으며 늘 동탁을 경호하였습니다.
동탁은 억세고 편협하며 화가 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민첩하게 피하고 사죄했기에 망정이지 죽을 뻔한 여포는 이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았습니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친분이 있던 사도 왕윤에게 수극 사건 등을 토로했습니다. 이때 당시 왕윤은 상서복야 사손서와 동탁을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고 여포가 동탁에게 불만이 많은 것을 알게 되자 여포에게 동탁 암살에 참여할 것을 회유합니다. 여포는 처음에는 부자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펄쩍 뛰었지만 왕윤이 “친부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극을 던지겠느냐”라고 설득하여 결국 여포가 동탁을 죽이도록 만듭니다.
ⓑ (삼국지연의)의 폐월 초선
● 충의지사
충의지사인 초선의 모습에는 유약한 여인의 모습과 마음이 강직한 지사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왕윤이 동탁을 제거하지 못해 애를 태울 때 “소용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합니다. 왕윤이 초선의 말에 답하자 초선은 다시 말하기를 “어찌 대감의 일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라는 요지의 말을 합니다.
● 님편의 대사를 그르치는 여인
초선은 남편의 대사를 그르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초선보다는 여포가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대사를 그르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문학적 장치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초선이 실존 인물이 아니기에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선은 철저히 연약하고 이기적인 여자로서 그려집니다. 이 때문에 일부 삼국지의 저자들은 이 부분의 초선이 여포가 동탁을 죽일 무렵에 등장한 초선과 별개의 인물이며 ‘가짜 초선’이라고 묘사하기까지도 합니다.
ⓒ 다른 작품에서의 초선
▶ 동탁이 죽은 직후 곧바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여포 사후 비구니가 되었다가 이전에 본 관우에게 반하여 관우를 끝까지 모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 관우의 연인이 되었지만 관우의 손에 죽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경영 및 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호장룡(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광활한 대륙의 무협액션 영화 리뷰 (0) | 2021.09.25 |
---|---|
오징어게임 넷플렉스 세계가 열광하다~~ (0) | 2021.09.24 |
영종도 을왕리 맛집 물회 전문점 선녀풍을 다녀왔어요~~ (0) | 2021.09.22 |
뚱보 아저씨 수제 돈가스 구성점에 다녀왔어요.~~ (0) | 2021.07.31 |
미금맛집 도쿄스테이크 맛있어요 (0) | 2021.06.22 |
댓글